메르시아의 별 감상 RPG 잡담



내일 더러운 워크샵 때문에 일찍 깨야해서 부랴부랴 쓰고 취침하니 사흘 뒤엔 수정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국에 rpg 펀딩이 활성화되면서 국산 룰북이 빛을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기존 룰을 개조해 쓰거나 서플리먼트이거나 자작룰이거나 하는 식으로 13년에 이미 나올 수 있는 패턴은 다 나왔습니다. 작년 여름 개시한 페이트 코어 펀딩에서 메르시아의 별이 선택한 길은 서플리먼트였습니다. 코어룰을 사야하지만, 반대로 룰이 튼실하고 검증이 된 만큼 안정적인 선택지입니다. 실제로도 초여명 측에서도 서플의 발매를 독려하는 편(뭣보다 라이센스비가 안 드니까요)이기도 하고요. 초여명은 과거에도 실피에나로 겁스용 서플리먼트를 발매한 바가 있으므로 이미 경험이 있는 편이라 볼 수 있겠구요.

먼저 실피에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실피에나는 읽으면서 꽤나 즐거운 책이었습니다. 다만 읽은지 절반도 안 되서 책의 한계를 명확히 느끼게 됐습니다. 구도가 너무 명확하고, 배경이 좁아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형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제 친구 표현에 따르면 단일 캠페인에 나올 배경을 서술한 것 같다고 하는데, 저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점에선 시나리오 요소가 좀 부족한 그리핀 마운틴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배경세계 지침서가 있다면, 거기서 어떤 지역을 따로 서플로 잡은 느낌입니다.

실피에나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좁은 배경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메르시아의 별에선 정 반대의 접근법을 행사합니다.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배경세계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퀵스타터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메르시아의 별의 테마는 저항입니다. 저항을 하려면 저항을 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국입니다. 그야말로 저항물의 알파이자 오메가이죠. 272쪽 분량 책에서 약 100쪽에 달하는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것 역시 제국입니다. 제국이 중심에 있고 나머지는 텅 비었습니다. 이 이유는 서문에서도 잘 나옵니다.

당시의 플레이 관습에서 마스터는 캠페인을 통채로 디자인하고 운영하는 반면, 플레이어는 자기 캐릭터 외에 설정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해결하면 플레이어가 자기 캐릭터만이 아니라 플레이 전체에 관심을 가지고 갖고 참여할 이유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즉, 마스터의 역할을 플레이어에게 일부 맡김으로써 마스터의 부담을 줄이고 플레이어가 캠페인에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기존 배경 설정이 다 그렇듯이 플레이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정에 어느 정도 이입이 되지 않으면 캠페인 진행이 힘들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나온 산물이 바로 메르시아의 별이라는 걸 밝히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실피에나도 그렇지만 좀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탄압을 위한 제국이라면 사실 제국의 설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속국이 어떻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당하고 있는지가 문제라고 봅니다. 이 점에서 비교할만한 것이 위시송님이 소개했던 D20 셋팅 미드나잇입니다. 탄압과 저항만을 다루는 셋팅으로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할 수 있는 탄압을 너무 자세하게 묘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이지 메르시아의 별은 디테일을 포기하고 너무 클리셰에 기대는 감이 없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기대더라도 내용이 자세하면 모르겠지만, 대충 이러저러하다는 느낌이고요. 사실 이입이라는 건 어느 정도 내용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밑바닥부터 되는 대로 만들기 시작하는 것으로 이입이 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차라리 간략하게 속국 지방에 대한 설명이 있고, ‘공백지역’을 강조하는 편이 나았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기후, 지역, 문화에 따라 제국이 억압하는 방식이 다를 테니 얼추 설명을 해주고 나머진 살을 붙이세요 정도가 나았겠죠. 인간의 창의력이란 것도 약간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첨부터 만들라고 하면 좀 막막하기도 하고요. 제가 던전월드 계열에서 굉장히 싫어하는 부분과 비슷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너무 클리셰에 의존해서 그런지 안이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메르시아의 별에서 설정 자체보단 마법과 같은 추가 규칙, 리플레이에서 이어지는 시나리오 부분이 가장 서플리먼트다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시나리오는 일직선 시나리오가 아니라 스스로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도록 재료를 제공하는 형식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책의 제목이 된 메르시아의 별에 대해선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너무 쎄요. 기껏 독립을 쟁취해봤자 시밤쾅이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글로란사에서도 핏빛 박쥐라는 유사한 요소가 나오긴 합니다만, 역사 내에서 격퇴한 전적이 있다고 명시해서 무적은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그에 비해 메르시아의 별은 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부쳤다가 되면 모를까, 저항할 수 없음이 돼버리면 무기력해집니다. 메르시아의 별에서 가장 밸런스를 못 맞춘 것이 메르시아의 별이라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합니다. 아마 룰북으로서 메르시아의 별을 쓴다면 자기식대로 정제를 해야겠죠.

이렇게 됐다면 차라리 페이트답게 페이트 주사위를 써서 제국을 만드는 표를 제공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국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창의적인 사람들이 제국을 못 만들 리가 없거든요. 그런 점에서 저는 메르시아의 별을 재미있는 실험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플레이 여부에 대해선 실피에나처럼 조금 난감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고 폄훼할 순 없는 게 서문에 나온 것처럼 배경세계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한 책은 저로선 이 책이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개선할 여지가 많으니 다른 회사도 참조해볼만한 독창적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독창성을 느끼기 위해서 책을 구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현재 평균 책가격과 비교해도 그렇게 비싼 가격도 아니라서 부담이 없고요.

덧글

  • 애스디 2015/01/07 06:39 # 삭제 답글

    지적하신 부분에 모두 공감이 가네요. 혼자서 일독하면서 놓친 점들이 많아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저도 [메르시아의 별]이 의미를 갖는 점은 플레이어들이 세계 설정에 공동 참여한다는 지향점이고, 이 부분이 페이트 코어라는 시스템과 궁합이 잘 맞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 플레이에서 얼마나 잘 풀려갈 지는 직접 해봐야 알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세계 설정을 다루는 방식은 실험적인 면이 많긴 하네요. 저도 좀더 상세한 예시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네요 (실피에나도 그런 식의 디테일에서 좀 부족함을 느꼈었습니다).

    @ '메르시아의 별' 설정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예리하시네요... 차라리 '필요악'으로서 제국의 성격을 보다 강조하거나 해서 다양한 입장이 나오는 쪽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 바이라바 2015/01/07 08:34 #

    필요악보단 걍 절대악으로 묘사하는 편이 더 낫다고 봅니다. 사실 속국 설정이 전무하다보니 제국의 명암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재해석의 여지 자체가 없어보였습니다. 이것으로 메르시아의 별 제국 설정 안에 가능한 모든 것을 넣어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그렇게 쓰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이건 실피에나도 비슷해서 작가 성향이자 취향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의도는 성공했지만,대신 마동기관 빼고 딱히 특징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죠.
  • 애스디 2015/02/06 06:06 # 삭제 답글

    마동병기 메르시아의 별이 너무 강력해서 캠페인 엔딩이 곤란해진다는 점 말인데요. PC들이 메르시아의 별을 오히려 탈취하거나 파괴해서 제국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는 결말은 어떨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상 현실의 핵무기 비슷하니...). 사실 생각해보면 스타워즈에서 데스스타 파괴 미션만큼이나 뻔한 클리셰긴 하지만... 이번 팀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에선 이런 가능성도 열어놓고 한번 진행해보죠 (하다보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고요).

    @ 한편 메르시아의 별을 손에 넣은 PC들(혹은 그 나라)이 타락해서 또 다른 제국을 낳는 식의 엔딩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세뇨르 2015/10/22 18:38 # 삭제 답글

    제가 보기에 메르시아의 별이란 마동병기의 설정은 플레이 내에서 실질적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저항 운동에 있어서 상황을 꼬고 갈등 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한 이야기적 장치입니다.

    애스디 님 말씀대로 실질적으로 핵무기 비슷한 건데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한 마동병기를 움직이는 게 그렇게 간단할 리 없거든요. 궤도 상에 떠 있는 거 명령 코드 입력하는데 반년 치 국가 예산이 들고, 목표인 속국 위로 이동시키는 데 1년 치 예산이 들고, 발사하는데 또 2년 치 예산이 들고.... 그런 식이겠죠. 비용 외에도 안정성이나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해(메르시아의 별이 자기가 다스리는 속주의 하늘 위를 지나간다면 어떤 총독도 불안하겠죠) 메르시아의 별은 제국 입장에서도 도저히 다른 방법이 안 통할 때 동원할 만한 최후의 결전병기라고 못 박아 놓은 상태에서 '그래도 상황이 너무 격화되면 제국이 메르시아의 별을 써 버릴 수 있으니 어느 정도로 저항 운동의 수위 조절을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PC들이 고민하게 만드는 역할이라고 봐요. 평범한 저항 운동도 지나치게 격화되면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되 제국이 통치를 포기하고 멸망시켜 버릴 수 있다고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 세뇨르 2015/10/22 18:43 # 삭제 답글

    책 63페이지를 보면 독립 이후 제국의 응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연작 캠페인에 대해 언급하고 "제국이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을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 이 시나리오나 연작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구절 보고 메르시아의 별은 이야기적 장치일 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 바이라바 2015/10/25 20:01 #

    1. 메르시아의 별은 구도와 방향 자체를 극도로 좁힙니다. 무장독립투쟁이 전제인 게임에서 애매하게 선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전제라고 봅니다. 칼을 든 이상 사생결단을 내야하는 상황인거죠. 이 상황에서 메별은 어떤 시도도 무력화합니다. 애매한 대치 상황이 이루어진다면 메별대신 본토 군단이 증원을 올테고. 고사당하겠죠. Asdee님과 했던 플레이에서는 결국 메르시아의 별을 막기 위해 결전병기를 만드는 쪽으로 갔고, 그렇게 엔딩이 났습니다. 다른 팀이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무력을 쓰면서 메르시아의 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죠.

    2. 참 재미있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자작설정이죠. 아무리 봐도 제국은 독립한 속국이라는 선례를 남기기 싫어서 부담없이 핵을 쏠거라고 생각합니다. 외교적으로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국가는 없고, 거리낌도 없죠. 실제로도 쐈고요.
  • 세뇨르 2015/10/28 02:18 # 삭제 답글

    애매한 대치 상황이 이뤄진다면 메별 대신 본토 군단이 증원을 올테고 고사당할 거라고 하셨는데, 네 현실적으로 보면 그렇게 흘러가는 게 합당합니다. 하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이 <메르시아의 별>이란 책은 만화나 소설의 설정 자료집이 아니라 RPG를 하기 위한 배경 자료라는 점입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와 샘이 골룸 끼고 죽음의 늪 지나서 결국 반지를 파괴하는 건 현실적인가요? 스타워즈 에피소드 4에서 루크가 실로 절묘한 타이밍으로 포스의 힘에 각성해서 데스 스타의 유일한 약점을 핀포인트로 파괴하는 것은 현실적인가요? 모든 디테일이 작가의 손에 달려 있는 픽션에서도 굳이 흠 잡자면 그런 문제가 있는데, 그걸 가지고 작품의 품질을 떨어 뜨리는 심각한 오류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요컨데, 이야기적 재미를 위해 리얼리티를 희생한 부분이죠. 단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픽션에서도 그러한데,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RPG에서 말씀하신 게 굽힐 수 없는 전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캠페인 내에서의 리얼리티를 어느 정도 선까지 정할 것이냐는 팀마다 달라지겠습니다만, 그런 비현실적인 부분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즐기는 게 RPG의 재미라고 봅니다.

    그걸 이야기 내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만한 떡밥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제국은 절대권력을 지닌 한 명의 황제가 지배하는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7개 도시국가의 연방국으로 시작했으며 원로원에 의해 지배되는- 즉 분열과 내분에 상당히 취약한 정치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요('정적이 메별을 독점하려고 들지 않을까'하는 상호 의심이 제국 의원들 사이에 퍼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국을 유일하게 무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인, 악마들도 큰 변수고요.애초에 책에서도 메별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어떻게 보호받는지 자세한 설정도 없거든요. 어쩌면 메별은 제국이 임의로 쓸 수 있는 병기가 아니라 독립된 의지와 지성을 갖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이것도 자작 설정이라고 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그런 디테일을 직접 채워가면서 플레이한다는 게 책의 방향성이라고 봅니다.
  • 세뇨르 2015/10/28 02:39 # 삭제 답글

    사실 책의 서술만 보자면 메별이라는 초월적인 병기를 굳이 상정하지 않아도 제국은 세계를 정복할 만한 스펙을 갖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도 굳이 메별의 존재를 상정한 것은 1)이대로는 제국이 강하기만 할 뿐 좀 밋밋하니 임팩트 있는 게 하나 있어야겠다 2)갈등 구조가 너무 단순해지고 지루해지는 걸 막는 맥거핀으로 쓰자 두 가지 이유라고 봅니다. 그리고 메별이라는 설정은 그 두 가지 역할을 전부 잘 수행한다고 보고요.
  • 바이라바 2015/11/02 23:22 #

    반지의 제왕과 스타 워즈와 비교하는 건 꽤나 억울한 비교인데, 소설을 어쨌든 작중에서 왜 그렇게 됐는지를 다 설명해주지만, 메르시아의 별을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거든요. 막말로 메르시아의 별의 정체는 외계에서 온 침략자라고 해도 합리화가 됩니다. 그저 하늘에서 빛이 나더니 반란도시 하나가 사라졌다만이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서술이니까요.

    저는 메르시아의 별의 전제 자체가 한 지방의 속국 3~5개를 배경으로 하면 적당하다는 것에서 게임이 설계됐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메르시아의 별이 세팅으로서 유의미한 것은 플레이어 조국 설정을 직접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지방으로 넘어가는 건 상정 범위를 넘어선 것이죠. 차라리 그런 식의 전개라면 설정이 자세한 다른 상용 세팅을 이용하는 쪽이 더 좋다고 보고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팀이면 굳이 메르시아의 별을 플레이할 이유가 없습니다. 팀 방향성에 맞는 배경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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