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RPG 펀딩에 대한 소고 1 RPG 잡담



  한국 최초의 RPG 크라우드펀딩이 진행된 지 어느덧 일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일년 사이에 다섯 건의 펀딩 중 네 건이 완료됐고 한 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사실상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내년에도 진행될 물건이 최소한 네 건은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커뮤니케이션 그룹에서 출간한 클래식 D&D 박스셋 이후 한국어로 된 RPG책은 한국 RPG쟁이들의 숙원이자 열망이었습니다. 수많은 번역본이 음지에서 나돌고 있지만, 정식이 아니기에 쉬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일년에 다섯 건, 문화불모지 남고려국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으니 모두 들뜰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감격의 시간이 벌써 일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펀딩 하나하나를 분석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건설적이지 않느냐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속가능한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선 지적할 부분은 지적해야하니까요.

  분석 기준은 건전성과 신뢰성입니다. 먼저 현재 한국 RPG 펀딩은 사실상 밀어주기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나오니까 의무감으로 '비싼 거'를 사주는 거죠. 언젠가 감격이 무감각해질 때 그때도 사람들이 고액을 주저없이 넣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단치 않은 금액이지만 같은 의무감이라도 매번 책 한권정도는 사주는 사람이 많은 편이 펀딩으로선 건전하다고 봅니다. 건전성은 모금자수는 얼마이고 평균모금액과 해당 펀딩 중간가의 격차가 얼마나 많이 나는가, 고액 구간 의존도가 얼마나 심한가 등등을 따집니다. 제 기준으로는 평균 모금액과 중간가 구간의 격차가 작고, 고액 구간 의존도가 적을수록 견실한 편이라고 판단합니다. 제일 좋은 건 고액모금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단순 책판매로서 고액을 달성하는 일이지만 미국의 FATE 킥스타터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죠. 사실 고액 모금자가 많다 하더라도 모금자수만 많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200명도 안 되는데 천만원이 넘어가는 기 현상이 문제일 따름이죠.

  신뢰성은 이 펀딩 진행과정에서 모금자들이 펀딩 주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따집니다. 이건 여기까지만 말해도 짐작이 가시리라 믿기 때문에 거두절미라고 본론으로 넘어가죠.



1. Dawn of FATE:운명의 새벽(https://www.tumblbug.com/ko/dof)

목표금액:  2,000,000원
달성금액: 10,561,020원(달성율 528%)
모금자수: 189명
평균금액: 1인당 55,878원

  1.1 건전성 - 지금 기준으로 봐도, 그 때 기준으로 봐도 참 미묘할 정도로 그냥저냥한 성적을 거두어 올렸습니다.  무려 최초인데도 말이죠. 그런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솔직히 DoF(이하 도프)의 성과는 굉장히 수준 이하가 아닐 수 밖에 없습니다. 고작 189명. 평균금액만 따지고 보면 초여명의 던전월드하고 비슷한데,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구매력의 대부분은 15만원 16명, 25만원 10명. 즉 약 500만원, 총금액의 약 절반 가량이 소수 구매자에게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저런 고액 구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겨우 천만원 넘긴 금액이 아마도 6~7백만원 대로 곤두박질쳤겠죠. 이게 바로 펀딩에서 총인원수 대비 고가 모금자수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건전성이 안 좋은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죠.

  15만원대와 25만원대의 금액대비 효율성을 보면 더더욱 끔찍해집니다. 도프 자체도 1년이 지연된 상황인데 미래에 언젠가 나올 책에 대한 약속은 펀딩 당시엔 그럴듯해보였지만 이제 와선 신뢰 자체를 할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리고 PDF 동봉 구간대 가격은... 뭐, 파는 사람 마음이라고 하지만, 가성비를 따지면 터무니 없이 비쌉니다. 아마도 아는 지인 - 그것도 연장자들이 잘 되라고 돈을 넣어준 것이고 그걸 기대하고 만든 금액구간이라고 밖에 해석이 안 됩니다. 이 성과 자체가 고액을 넣어준 사람들의 호의에 크게 빚을 지고 있는 겁니다.


  1.2 신뢰성 -  마침 제작 지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펀딩 물건이란 건 사실 다 만들어놓지 않고 돈을 모은 다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제 날짜에 나오기가 힘듭니다(던전월드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죠). 그래서 날짜가 지연이 되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도프 제작진이 굉장히 아마추어 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지연에 대한 대응이 굉장히 조잡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다쳤다는지 기기가 고장이 났다는지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 대부분 공지사항을 보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알 수 없는 종이쪼가리 사진 몇개를 올려놓고 열심히 진행 중이라는 말로 정확한 진행상황을 회피하고 있죠. 미공개 공지에선 어떤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진행상황에 자신이 있으면 구태여 미공개 공지를 올리지도 않았겠지만요.

  도프 이후엔 아마도 훨씬 조직화해서 일을 진행하길 바라지만, 사람들의 신뢰가 굉장히 떨어진 판국에 미래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미국 펀딩의 경우 (아마도) 완성이 늦더라도 모금자들을 달래기 위해서 초고 PDF를 보내주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런데 도프의 경우 15만원을 내야 PDF(즉, 작업 완성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다른 3건의 펀딩은 PDF만 따로 파는 구간이 있죠. 15만원을 내야 볼 수 있게 한 것으로 볼 때 아마 돈을 주면 검수할 권리를 주겠다고 한거나 다름없습니다. 마법서점처럼 그냥 안 파는 것도 방법인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용물이 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기간만 늘어지고 있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슬슬 분노게이지가 MAX를 찍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실제로 찍은 분들이 많습니다.

  기간 얘기도 나왔으니 말인데, 까고 말해서 내년 3월까지도 배송이 시작되지 않으면 어떤 반응이 터져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전 2년까진 기다려줄 순 있는데, 한국 사람들 입장에선 1년도 충분히 참아준거니까요. 사실 아직까지 인쇄 샘플이 나온 상황조차 아니라, 레이아웃때문에 버벅거리고 있는 걸 보면 돈 안 넣은 게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건 나와도 실패입니다. 호의에 갚는데 실패했으니까요. 아래 던전월드 설명을 보면 얼마나 처참한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3 사견 - 아무리 봐도 출판사업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사업을 진행한 것 같습니다. 초여명같이 경험이 풍부한 곳에다가 의견을 구했으면 이정도까지 사단이 나지는 않았을 거라 봅니다. 신규 진입자가 가장 의지할 데라곤 기존 경험자가 구르면서 익힌 노하우인데 폴라리스랑 달리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 겨울 캠프라거나 그런 걸 할 상황이 아닌데, 하겠다고 공지를 올린 거 보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의 돈받고 하는 일이란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닌데 말이죠. 아마추어라도 돈을 받은 이상 자기 일은 마무리지어야죠.

  아마도 도프의 유일한 업적이라고 할만한 게 있다면 펀딩의 물꼬를 텄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꼴이 말이 아니고, 아래 던전월드가 하도 대단해서 어쩌면 최초의 펀딩은 던전월드라고 기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던전월드 때 분위기가 그랬고요. 저도 그편이 한국 RPG 계를 위해선 좋지 않나 싶습니다(...).



2. 던전월드(https://www.tumblbug.com/ko/dwkr)

목표금액:  3,000,000원
달성금액: 58,410,564원(1974%)
모금자수: 1050명
평균금액: 1인당 55629원

  2.1 건전성 - 지나치게 최고가 구간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긴 하지만 그 가격을 생각하면 납득 못 할 수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일무이하게 고가 구간 경품을 초기부터 사진까지 올린 건 던전월드 뿐입니다(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1000명이 넘는 대업을 세운 것을 생각하면 구간별 분포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로 분석할 필요도 없겠죠.

  다만 앞으로 두 번은 없을 성과를 거두었기에, 아마도 다음 펀딩이 이루어지면 한국 RPG계 내부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사료가 됩니다. 제 입장에서 던전월드의 성과는 비RPG인구가 기여한 바를 절대 무시할 수 없기때문에 판단을 보류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2.1 신뢰성 - 비판할 구석이 별로 없습니다. 제 때 나왔고 공약도 다 지켰습니다. 공지사항의 경우 아주 꾸준히 올라와 진행상황을 알렸죠. 이건 모두 초여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관리능력이었습니다. 기존 출판 경험도 풍부했죠. 3자 입장에서 볼 땐 일정을 지키기 위해 약간 다급하게 일은 진행하신 거 아니냐라 할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습니다. 아마도 초여명에서 다음 펀딩을 한다면 이보단 널럴한 일정에서 할지도 모르죠.

  AW의 경우 발매 공약이 나왔을 때, 펀딩을 한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평소처럼 발매하겠다고 한 선택은 옳았고, 필수였다고 봅니다. 앞으로 펀딩을 하실 분들이 있으면 공약 중에 미래에 다른 책을 낸다는 약속을 했을 때 그게 펀딩인지 일반 발매인지를 정확히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2.3 사견 - 아주 모범 사례이므로 앞으로 모든 펀딩은 던월을 기준으로 비교당할 것입니다. 그게 정상이고요. 아, 금액은 빼야겠습니다. 수천만원 성과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요. 그저 초여명처럼 제 때 공지하고, 제 때 책만 내주는 것만 본받으면 됩니다. 사실 그것조차 따라하는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재 5건 중 3건이 웃기게도 자작 내용이 많이 들어간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간이 늘어질 수 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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